-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이 책의 저자는 강연프로그램이나 인문학 프로그램을 종종 보는 사람들도 알 수 있는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고전평론가이자 작가이다.
고전을 리-라이팅 하여 고대 학자들의 지혜를 현실에 맞게 해석하여 현대인들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강연을 감명깊게 본 것은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했던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라는 주제다. '백수'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흥미로울 수 밖에 없다. 돈많은 백수, 우리시대 누구나 꿈꾸는 것 아니던가? 그녀의 이야기는 연암 박지원의 생애를 통해 바라보는 자발적 백수의 삶의 방식이다.
백수에 대한 꿈은 다음 기회에 펼치기로 하고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라는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블로그에 두권의 책 리뷰를 작성하면서 나의 글에 대한 창피함과 불편함을 느껴서다. 글쓰기 방식, 글쓰기 원칙에 관한 책들을 뒤적거리다가 제목이 너무 멋져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고 쓴다는 행위와 거룩하고, 통쾌함이 연결지어 진다는 건 솔직히 말도 안되는 것이다. 어려서 부터 책을 많이 읽는 어린이는 착한 어린이라는 가스라이팅 비슷한 것을 당하며 성장한 탓인가? 1년에 몇권 읽지 못하더라도 취미는 '독서'라고 쓰지만 나에게 읽고 쓰는 것은 괴롭고, 힘들고, 졸리고, 창피하고, 불편하지만 많이 읽은 것은 좋은 것, 그리고 글쓰기는 특별한 사람의 일이리라.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 온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니. 큰일이다. 도움이 필요했다. 이 책에서는 내가 기대했던 글쓰기 요령, 글쓰는 방법론 따위는 없다. 읽으면 읽을 수록 망했다. 하지만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글쓰기의 필요성, 글쓰기의 당위성, 글쓰기의 치유성 등등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에 홀려가고 있었다.
- 산다는 것 - 안다는 것 - 읽고 쓴다는 것
저자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자연의 이치와 천성을 깨닫고 호흡하며, 사물과 사람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려면 자연의 속도와 리듬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간절히 궁금해 하는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한다. 모든 배움의 기초는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궁금해 해야 하는 것일까? 양생을 잘하려면? 몸과 이치에 대해 궁금해 하라. 구도자가 되고 싶다면? 삶과 죽음의 원리에 대해 궁금해해라. 밥벌이를 잘하고 싶다면? 돈과 활동과 관계에 대해 간절히 궁금해하라. 그것이 천지 '사이에서' 인간의 길이자 운명이라고 말한다. 산다는 건 곧 궁금해하고 질문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가 최우선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가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다.' 존재의 GPS처럼 하늘을 봐 자신과 세계가 마주치는 접점을 찾아보고, 자신이 발딛고 있는 땅을 살펴 보는 것. 방향이 어디인지, 좌표값이 얼마인지, 그것에서 삶의 비전이 나오고 방향성이 정해진다.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의 본질이라고 한다. 인생이라는 길위애서 길을 찾는 앎 이것이 바로 지도이며 이것 없이는 방황하고 헤매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어두워서 무서운 것이 아니다. 몰라서 두려운 것이다. 알지 못함은 그 자체로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천지의 운행을 주시하여 알게 하는 것은 "읽기", 그 사이 삶의 비전을 열고 방향성을 정하는 것은 "쓰기" 이다. 이 둘은 나뉠 수 없다. 하늘을 보는 것과 땅을 살피는 것이 동시적이어야 하듯, 읽기와 쓰기는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산다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간의 조화를 '아는' 것이고, 그 아는것의 구체적 행위는 '읽기와 쓰기'이다. - 읽는다는 것, 쓴다는 것 -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신의 선물, 읽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모든 종교가 각자가 생각하는 진리를 책으로 만들어 설파한다. 코란, 성경, 불경 등등 진리를 책에 담아 읽고 또 읽어 진리에 가까워져야 한다고 가르쳐준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읽은 행위와 분리 될 수 없다.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행위이다. 읽은 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가장 신성하고 거룩한 행위이다. 이렇게 거룩한 행위를 통해 얻은 지혜와 지식은 그것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말과 글로 다시 재탄생하여 본인의 그것을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읽었다면 써야한다. 들었다면 전해야 한다. 읽는자와 쓰는자 따로 구분하지 말고 모두 써야한다. 그것이 읽은것의 배운 것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깨달음이 있는 읽음 이었다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말로 알려줄 수 있다면 글로 쓸수도 있다. 결국 마지막은 쓰는 것이리라. 쓰는 행위는 손이하는 보편적이지만 거룩한 작업이다.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정신적이다. 무형이면서 유형이다. 내부적이면서 동시에 외부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글을 쓰려면 뇌, 눈, 혀, 손 모두가 함께 움직여 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가 어렵다.
- 감히 알려고 하고, 감히 쓰려고 하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는 스마트폰, 노트북 등 기타 스마트 기기만 있다면 어디서든지 글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기적과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먹을 갈 필요도 없고, 연필을 깎을 수고로움도 없다. 지금의 편리함은 쓰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 붓다, 공자, 노자 등 지혜자들의 그것을 감히 알고자만 하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현대사회의 편리함은 그대로 누리면서 나의 인생 지도를 함께 그려줄만한 이들의 지혜와 논리를 찾아야 한다. 알아야한다. 그래야 편리함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읽고 써야 한다. 특히 고전의 바다를 유영해야한다. 고전이란 존재와 세계에 대한 탐구다. 고전을 탐구하다보면 반드시 현자들과 만나게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저 현자들의 사상적 그물망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앎의 여정도 '축의 시대' 현자들로 이어진다. 그 현자들과의 만남에 접속하는 것이 읽기와 쓰기이다. 그렇게 된다면 카렌 암스트롱의 "우리는 한번도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암스트롱 '축의시대') 의 말을 이해 하게 될 것이다.
읽는 내내 진짜 그러한가? 읽기만 해도 훌륭한 것 아닌가? 읽지도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 비하면 난 훌륭한 사람 아닌가? 하는 의문과 지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책을 덮고 위의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읽고 쓰는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누려야할 마땅한 축복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우리들은 그 축복을 얼마나 많이 누리고 살고 있는가? 그 축복을 통한 거룩하고 통쾌한 선물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가? 그 경험의 유무는 삶의 태도를 바꿀 만큼 큰 것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위 질문에 거침없이 답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길 바래 본다.